어린 시절 아버지 무릎에 앉아 같이 신문을 봤다. 말 그대로 그냥 눈으로 본 것이다. 취학도 전이었으니 시쳇말로 까만 건 글자고 나머지는 흰 여백이었다.

“아빠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음 이건…” 아버지는 단 한번 막힘없이 술술 읽어 내려갔다. 1980년대 신문은 한자투성이였다.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의 난공불락 성(城)에서 아버지는 완벽한 성주였다. 나중에 커서 엄마에게서 들었다. 아버지는 국졸이었다.

엄마는 그나마 국민학교도 졸업을 못 맡았다고 평생을 한스러워했다. 일흔을 훌쩍 넘은 부모 세대의 시대적 폐허와 그 궁핍함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훗날 대전일보 기자가 됐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셨다.

엄마는 이재(理財)에 밝았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20여 년 전, 수천만 원은 돈도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사업을 해보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것도, 폐업에 이어 다시 창업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뒷받침이 컸다. 큰 공부를 하겠다며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방황했던 자식들 뒤치다꺼리도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한푼 두푼 재산을 모으는 것보다 자식의 학업이 먼저였던 결과로 주어진 가난을 부끄러워한 적 없다. 그것은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라고 여겼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핑계로 한참동안 만나지 못한 부모를 지난 추석에 잠깐 봤다. 백발성성해진 늙은이가 집에 오셨다. 마흔 중반 아들내미 머리에 벌써 허옇게 눈이 내렸다고 안쓰러워하는 노부모의 눈을 끝까지 마주치지 못했다.

기자로서 나의 첫 바이라인(by-line)은 파파(papa)였다. 결혼은 늦었고 기자 입문도 늦깎이여서 첫 아이 잉태와 기자생활 시작점이 비슷하다. 바이라인 파파는 아빠로서의 무게와 내가 선택한 업에 대한 일종의 주술적 의식이자 다짐이었다. 그 다음은 유니(younie), 헤이윤(heyyun)이다. 모두 첫 아이 이름자를 그대로 썼다. 이어진 바이라인은 베어(bear)다.

단어 뜻 그대로 참고 견뎌야 했던 날들이었다. 중의적으로 꽃을 피우듯 둘째가 생겼다. 바이라인과 이메일 주소는 이제 스타리카이트(starrykite)가 됐다. 별 총총한 starry는 첫 아이 이름자, 하늘 나는 '연' kite에는 막내 아이 이름 한자 빛날 연(娫)을 담았다. 기자로서 매일 생산하는 기사는 당시 나의 발품과 취재력, 지식을 총망라한 것이었고, 아이들 이름을 바이라인으로 달고 지면에 내보내는 기사를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그쳐왔다. 벌써 10년 세월이 흘렀다. 선배들께 부끄럽고 후배들에게 겸연쩍다.

어느새 첫째 아이가 자라 초등학교 2학년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다니며 흙 만지고 놀았는데 미증유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꼼짝없이 갇혔다. 학교는 적막강산이고 아이들도 부모도 가택연금됐다. 또래 친구들과 밖에 나가 땀범벅이 되도록 뛰어 놀아도 시원찮을 판에 감염 걱정에 사로잡혀 집안에만 있으니 좀이 쑤신다.

휴일이면 삼시세끼 네 식구 둘러앉아 오순도순 밥 먹는 게 재미다 싶다가도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막내 아이는 살이 오르고 하나둘 말을 배운다. 지긋지긋한 일상,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내일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예측가능성. 누군가는 그것을 견디고 다른 누구는 양분 삼아 자라난다. 또 어떤 이는 나이를 먹는다. 불가항력한 삶의 연속성과 숭고함과 견고함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도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운이 좋다면 아파트 청약에 당첨돼 두 아이에게 방 하나씩 해줄까 모르겠다. 오랜 무주택자의 서러움에서 벗어나는 날이기도 할 것이다. 경제적인 풍족함과 거리가 먼 결핍의 길을 선택하면서 무엇보다 설레고 두려운 일이 하나 있다. 아빠의 직업을 알고 있는 내 아이들이 언젠가 성장해 자신의 이름자 바이라인이 달린 기사들을 읽고 뭐라고 할지… 동시대 독자의 독해와 다를 게 자명하다.

그리고 포털의 위력은 분초 안에 나를, 나의 분신 같은 기사를 아이들 앞으로 소환해 낼 것이 아닌가. 그럴 때마다 나는 대전일보사 6층 신문박물관에 올라가 70년 켜켜이 쌓인 지면과 먼지 속에서 파묻힌 채 10년, 20년 후 나의 오래된 역사를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대전일보 문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