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 어느 날 고향 충남 천안 집 뒤로 펼쳐진 봉서산에 올랐다. 서울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 19년을 이 산 인근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모님과 함께 다람쥐의 일용할 양식을 훔치던 일탈, 초등 땐 태권도 대회에 나가기 위해 도장 동료들과 체력훈련을 나섰던 열정 등 갖가지 추억이 봉서산에 깃들어 있다.

봉서산 등산 안내도

성인이 되고 천안 자체를 자주 들르지 못하며 서서히 잊혔던 봉서산의 기억. 때문에 오랜만에 찾은 이곳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달라진 환경을 마주하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놀라움은 산 입구에 세워진 봉서산(鳳棲山) 등산안내도에서부터 시작됐다. 언제부터 안내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산 이름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봉서산은 풍수지리상 봉황새가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는 형상과 봉황이 깃들어 쉬고 있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19년, 길게는 29년을 터 잡고 있던 동네에 이토록 무관심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언론고시반에서 기자 출신 선생님께서 줄곧 강조했던 것은 ‘내 주변’이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의 역사, 특히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리는 기자로서 알고 또 알아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들었다.

실제 언론고시를 하며 25개구와 한강, 4대문, 4대 내산과 외산이 포함된 서울 지도를 그려가며 외웠고, 지금은 상당 부분 까먹었지만 미국 지도, 대륙별 지도도 어렴풋 기억난다.

지난한 언론고시 과정을 버티지 못하며 충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세상의 굵직한 사건만큼이나 주변의 생활상도 중요하고 이를 이해하려면 지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에 후회는 없다.

이렇다 보니 2020년 말경 기자가 되기 위해 대전에 내려 와 한 일 중 하나는 언론사가 위치한 갈마동의 유래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직장생활을 위해 거처를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동물을 좋아해서인지 갈마(葛馬)라는 명칭이 정감 가고 좋다. 풍수설에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명당이 있다는 데 유려했다고 한다.

갈마역 지하철역 내 벽화

조선시대엔 말이 교통수단이었으니 과거의 갈마동은 지금의 주유소쯤 됐을까 싶으니 신기하고 흥미롭다. 지금도 갈마역에 가면 한쪽 벽면에 통으로 적색 말이 그러져 있는데 볼 때마다 괜히 교통수단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것 같아 웃기다.

어느 덧 기자만 4년 차, 대전에서 지낸 지도 그만큼 됐다. 이제는 운전도 능숙하게 해 대전 곳곳을 누비고 시야도 갈마동에서 더욱 넓어지고 있다.

다른 동네는 어떤 역사, 어떤 유래를 간직하고 있을지의 궁금증을 최근 ‘스토리 대전(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엮음, 월간토마토 출판)’이라는 책을 읽으며 어렴풋이 살폈다.

출입처인 한화이글스 야구장 뒤로 우뚝 솟은 보문산에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어 보물산, 지금의 보문산이 됐다는 유래는 참으로 그럴싸했다. 보문산이 위치한 부사동은 삼국시대 부용과 사곡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 기원해 두 이름의 앞 글자를 땄다는 전설도 있다.

또 영화관이 있어 자주 가는 탄방동은 과거 숯을 굽던 마을로서 고려시대 망이 망소이의 난이 주도된 배경지였다고 한다. 당시 탄방 지역은 공주 관할이었긴 해도, 엄밀히 12세기 인간평등, 차별철폐운동의 시발점이 대전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작고 사소해 보이더라도 눈과 귀의 신경을 놓아선 안 되는 이유다. 고향 집에서 불과 2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봉서산의 유래를 이제야 알았다는 것에 반성한다.

그래도 아직 열정이 꺼지지 않았을 때 인식하게 돼 기쁘다. 동네의 유래, 이야기, 생활상을 기록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어원 그대로의 기자이지 않을까. 출입처에 기자 이름을 알리는 양질의 기사, 사회적 반향을 이끄는 문제해결형 기사, 조회수를 좇은 섹시한 기사에 목매는 날이 훨씬 많겠지만, 그래도 대전의 소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싶다.

김중곤 충청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