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배우기로 했다. 어릴 때 배우다 그만둔 이후 25년 만이었다. 이제는 악보도 익숙하지 않아 음표를 하나씩 세어가며 읽어야 하고, 손가락도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 원장님과 상담에서 피아노를 처음 시작할 때 배우는 ‘바이엘’부터 다시 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원장님은 연주하고 싶은 곡이 있냐고 묻더니 뉴에이지 곡 하나를 추천했다.

초보자용으로 쉽게 편곡된 악보를 일단 해보고 선생님과 다음 곡을 정하라고 하셨다. 유튜브로 악보를 빨리 읽는 요령을 익히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버벅거리며 잘 연주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이 곡이 나에게 너무 쉬운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음 시간에 연주해보자고 권한 곡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였다.

악보를 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악보에 음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음을 하나씩 쌓아가며 연주해야 해서 여간 어려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한창 피아노를 치던 때에도 시도조차 해본 적 없었다.

나는 선생님께 너무 어려워서 못 칠 거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여러 달이 걸릴 수도 있지만 일단 해보자고 했다. 선생님은 한 달이면 연주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예상은 빗나갔다. 나는 그 곡을 2주 만에 끝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드뷔시의 ‘달빛’, 쇼팽의 녹턴 9번 2악장 등 음표가 여러 개 붙은 곡들을 연주해나갔다. 내 평생에 연주할 수 있을 거라고 결코 생각해본 적 없는 곡들이었다.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걸까. 스스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배움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배우던 어린 시절의 나는 선생님이 20번 연습해오라고 숙제를 내니까 어쩔 수 없이 피아노를 쳤다. 그마저도 연습하지 않고 그냥 피아노 학원만 왔다 갔다 하는 날도 많았다. 당연히 실력은 늘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당시 선생님이 이 부분은 작게 연주하고, 여기는 한 음 한 음 눌러 치라고 알려주었지만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피아노를 눌러 치지, 안 누르고도 칠 수 있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25년 만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서툴더라도 곡을 해석하려고 했다. 트로이메라이가 ‘꿈꾸는 일’이라는 뜻이구나, 정말 꿈꾸는 듯한 느낌의 곡이네, 느낌을 잘 살리려면 이 부분은 살금살금 걸어가듯 연주하면 좋겠다는 등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선생님께 내가 해석한 게 맞는지, 어떻게 연주해야 살금살금 걸어가는 느낌을 살릴 수 있는지, 많이 물어봤다. 선생님도 내가 피아노를 잘 치는 건 아니지만 곡에 본인만의 느낌이 있는데 그게 나쁘지 않다고 했다.

난 25년 만에 어릴 적 선생님이 나에게 바랐던 게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나는 선생님이 설명해줬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는데 어떻게 지금은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갑자기 알게 된 것일까. 지난 25년 동안 피아노 앞에 앉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 새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문제가 어렵다는 비문학 지문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대장의 융털과 관련된 생물학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과학 출입할 때 매일 읽던 보도자료보다 쉬웠다. 고등학생이던 20년 전에 읽었다면 분명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을텐데 말이다.

세상에 쓸데없는 경험이란 없고 내가 살아오며 겪은 모든 것들이 쌓여 내 자산이 되는구나, 싶다. 지금까지는 배움에 때가 있다는 말의 뜻을 ‘어릴 때 배워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는데, 나는 이제 배움의 때란 각자 모두 다른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난 오늘도 궁리한다.

어떤 새로운 것을 또 배워볼까.

이연경 KBS대전 기자